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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기?    일본의 전쟁범죄    항의서한  

 일본의 전쟁범죄는 엄청난 규모 때문에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와 비교되기도 합니다. 일본의 전쟁범죄로 약 3000만명의 아시아인들이 고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본군은 약 300만명에서 1천만명의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미얀마, 중국, 조선인들을 살육했습니다. 또한 수백만명을 강제 징용하여 노예로 삼았습니다. 포로에 대한 대우도 열악하여 2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가 된 나치 독일군의 생존률은 96%였던 반면, 일본군의 포로가 된 연합군의 생존률은 30%에 불과하였습니다. 일본 해군은 포로들은 바다에 수장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문제점은 그들은 이러한 역사를 반성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일본은 평화헌법의 개헌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다시 군사대국으로서의 일본을 꿈꾸고 있습니다. 일례로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은 태평양 전쟁 당시 구(舊) 일본제국군의 군복을 입고 전범기를 흔들면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러 가기도 합니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무수히 많지만 아래에서는 대표적인 몇 가지 범죄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강제징용

1947년 일본 대장성 관리국에서 작성한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라는 문건에 따르면, 1934년부터 패전 직전까지 노무자 송출 등 조선인 징용자는 총 612만 6180명으로, 당시 조선인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 강제로 징용되었습니다. 징용된 인원들 중 한반도 안에서 징용을 산 이들은 그나마 나은 처지였습니다. 약 15만명의 인원이 강제로 사할린으로 징용되어 석탄 채굴 등의 강제 노동을 해야했으며, 심지어 사모아와 같은 적도 근처에 있는 섬까지 강제 징용되기도 하였습니다.
| 참고 : [日 학자가 펴낸 '조선인 강제 징용사', "하루 17시간 노동에 구타…아소탄광은 지옥"] |

 징용된 조선인들은 일본, 남양 군도, 버마, 사할린으로 끌려가 탄광, 군수공장, 토목공사장에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엄청나게 강도 높은 강제노동과 구타로 한국인은 수없이 죽어나갔습니다. 일본은 공사가 끝난 평양 비행장의 공사장에서는 보안 유지를 이유로 조선인 징용노동자 800여 명을 집단학살했고, 지시마 열도에서도 5,000여 명의 징용노동자를 역시 기밀누설 방지를 내세워 학살했습니다. 남양 지방의 섬에 끌려간 경우에는 일본군의 후퇴와 함께 동굴 속에 가두어져 무참히 학살당한 예도 있으며,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 광산 노동 중에 있던 수많은 조선인이 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정부 및 전범기업들은 이들에 대한 어떠한 보상도 거부하고 있습니다.


탄광에 합숙소에 쓰여진 흔적. '고향에 가고 싶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어'라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 침략한 아시아 각국의 사람들 및 전쟁포로들은 강제 노역을 하여야 했습니다. 중국인의 경우 1천만 명 가량이 동원되었습니다. 강제징용된 사람들은 미쓰비시와 같은 전범기업이 운영하는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거나 일본군 밑에서 노역을 하여야 했습니다. 약 4백만 명에서 1천만 명의 강제징용자들이 일본군 밑에서 강제 노동을 하였습니다. 노동은 무척 고되어 10만명의 포로들이 미얀마에서 철로 건설중 사망하기도 하였고, 다른 일본군의 점령지로 전출된 27만 명의 인도네이사인들중 오직 5만 7천명이 생환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은 계속되는 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하게 되자 총알받이로 쓰기 위해 한국인 청년들을 전쟁터로 끌고 나갔습니다. 학도병제와 징병제 등으로 21만 명의 한국인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나갔고, 그 대다수가 전사했습니다.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 중 가장 혹독한 식민통치를 자행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역사적인 청산은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 참고 : [일제 징용 '대가' 꼭 돌려받고 싶다] [하룻밤에 읽는 한국사 (최용범 著)] |

대량학살


 일본은 점령지 국민들은 일본 국내의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는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정부는 1923년 일어난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이 도쿄 전체를 방화하고 독을 뿌려 일본인을 살해한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퍼뜨려 조선인들에게 불만과 불안의 화살을 돌리기도 하였습니다. 일본 경찰의 암묵적인 지시를 받은 일본인 자경단원은 조선인이라면 무조건 죽창, 칼, 목도, 낫으로 살해했으며, 여성들은 강간한 뒤 사지를 찢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관동대학살로 불리는 이 인간 사냥에서 확인된 조선인 사망자만도 6,661명에 이르렀다.


일본에게 점령지의 국민은 단지 그들을 위한 노리개일 뿐이었습니다. 죽은 중국인의 시체로 군사훈련을 하는 사진.

 독립군의 대부분은 한반도와 가까운 중국 만주 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하였는데 일본은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만주 군벌과 연합하여 조선인 민간인 학살은 물론이요, 독립군의 경우 발견하는 즉시 즉결처분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은 독립군의 활동을 억압하기 위하여 1920년 간도에서 무고한 조선인 1만여 명을 학살하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채를 불태우기도 하였습니다.
| 참고 : [
두산백과: 경신참변] [네이버 지식백과 : 관동 대지진과 조선인 학살 사건] |

 일본은 중국에서 난징 대학살을 일으켰습니다. 난징 대학살은 일본군이 산둥성 지난을 거쳐 난징으로 진격 중에 약 30만명을 살해하고, 난징 점령 뒤에도 약 4만 2천여명을 살해한 사건을 말합니다. 학살은 부녀자의 경우 대부분 강간후 살해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생매장, 화형 등 극악한 방법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특히 일본군은 죄 없는 중국인 100명을 누가 빨리 칼로 목을 베나 시합을 벌였을 정도로 난징 대학살 중 그들의 잔악성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 학살의 피해는 중국인에게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미국, 영국, 독일 등의 외교관 저택, 중국인 피난민을 구조하였다는 이유로 미국인이 경영하는 병원, 학교, 교회 등도 약탈되었습니다.
| 참고 : [위키피디아 : 난징 대학살] |


미국인 포로를 사형시키는 사진(우)

| 참고 : [두산백과 : 제네바 협약] |
| 추가설명 : 제네바협약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체결되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 4개 조항의 제네바협약이 완성된 것은 1949년이지만, 제네바협약은 1864년부터 하나씩 체결되어 온 것으로 
포로에 관해서는 3번째 제네바협약으로써 1929년에 '포로의 대우에 관한 조약'이 체결된 바 있습니다. 일본은 제네바협약의 가입을 거부하였습니다.  |


일본 신문에 보도된 누가 더 빨리 100명의 사람을 칼로 죽이나 시합의 우승자들

위안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 중 위안부 문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사안입니다. 일본은 '공장에 취업시켜 주겠다.', '일자리를 알선해 주겠다.', '일본 유학을 보내주겠다.' 등의 말로 여성들을 모집한 뒤 이들을 강제로 위안부로 징집했습니다. 위안부들은 조선내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군이 주둔한 아시아 전역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는 한국, 중국, 대만, 필리핀, 호주 등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습니다.

 이렇게 성적 노리개로 학대한 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일본은 수천 명의 위안부를 폭살시키거나 수장시켜 몰살했습니다. 살아남은 종군 위안부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최근 외국에서도 위안부 기림비나 힐러리 국무부 장관의 Sex Slave 발언 등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고조된 상태입니다. 아래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신문기사 인용문입니다.

「일본 육군성은 1937년 남경대학살 당시 빈번한 강간 등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자 성병 예방과 치안 유지, 위안 제공 등 목적을 추가해 군 전체에 위안소를 본격 설치·시행한다. 일본군 위안부 총수는 최대 40만명까지 추산된다. 이중 조선인은 10만~20만명으로 추정된다. 강제 동원된 조선인 대다수가 빈곤층 중에서도 극빈한 가정 출신으로 취업사기나 인신매매 형태로 끌려왔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들은 외출과 휴무, 계약 해제 등의 자유가 박탈됐다. 하루에 20~30명을 상대해야 했고 폭행과 억압, 임신 등에 무방비로 노출됐다. 종전 후 일본군 위안부는 주둔지에 버려지거나 집단 학살됐다. 버려진 위안부는 외국군과 현지인에게 강간을 당하고 굶어 죽거나 수용소 생활을 해야 했다.」
| 참고 : [위안부, 일본에 의한 국가범죄]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

731부대

 일본의 널리 알려진 전쟁범죄 중 다른 하나는 일본제국 육군 관동군 소속의 비밀 생물학전 연구 및 개발 기관으로 창설된 731부대입니다. 731부대는 세균무기와 같은 효율성이 큰 대량 살상무기를 연구, 개발하기 위해 창설되었으며, 각양 각색의 생체실험을 자행하였습니다.

 실험 대상은 완곡어법으로 ‘통나무’(마루타)라 불리었으며, 실험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동원되었습니다. 수많은 실험과 생체해부가 실험 대상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없이 이루어졌으며, 실험 후 대상이 생존해있는 경우 일본군들은 죽음을 앞둔 수용자들을 원판에 묶은 뒤 원판을 돌리며 그 원판에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731부대의 실험 과정에서 3000명 가량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의 세균살포로 인하여 약 58만명이 페스트, 콜레라, 탄저병 등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때 얻은 실험 결과로 일본의 제약산업 및 의료기술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참고 : [위키피디아 : 731 부대] [일본 ‘731부대’ 세균 살포 … 2만6000명 페스트균 감염] |

식인행위

 많은 보고서와 증언은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군이 식인행위를 자행했음을 보여줍니다. 일본군은 전선의 확대, 연합군의 보급로 차단 등으로 인해 촉발된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을 먹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식인행위는 종종 장교의 지휘 아래 전체 부대에 의해 행하여졌습니다.

어느 한 인도인 포로는 일본군이 포로를 살해한 후 다리, 허리, 엉덩이 살을 베어내어 튀겨먹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살아 있는 포로의 생살을 도려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 경우 일본군은 살아있는 포로의 살을 베어낸 뒤, 포로가 사망하면 시체를 도랑에 내던져버렸습니다.

 이 외에도 일본은 과거 무수한 전쟁범죄를 저질렀으며 이러한 일본군의 잔악한 전쟁범죄의 상징이 바로 욱일기, 전범기입니다. 일본은 패망 후 해군 자위대의 기로써 전범기를 복권한 뒤, 이 깃발을 현재 일본 자위대의 상징으로 삼고 있으며 문화적 아이템으로써도 이 전범기를 적극 활용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전범기가 전범국에 의해 적극 활용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 참고 :
[이것이 일본의 실체입니다.] [위키피디아 : Japanese war crim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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